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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50. <태사공>가은공휘영득비문(稼隱公諱永得碑文)
1. 문헌 목록 〉20. 20世 〉52. <태사공>자성재공휘상렴묘갈명(自省齋公諱相廉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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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태사공>자성재공휘상렴행장(自省齋公諱相廉行狀)
<태사공후>자성재공휘상렴행장(自省齋公諱相廉行狀) 公諱相廉字兼之號自省齋玉川之趙以高麗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為鼻祖平章事璵忠獻公元吉判書淵仕我朝舍人膺司正得才郡守長孫通政瑪瑀士弼通政景忠 贈叅奉繼勳嘉善光踪察訪廷協通德郎希壁即公五代祖也高祖諱萬益曾祖諱泰基皆隱德不仕祖諱以周,贈掌樂院正考諱漢佐贈左承旨妣淑夫人礪山宋氏之籙女公生于 正宗丙申性明敏慈仁在於髫()能知愛親敬長及就學不煩師父之督而自知讀書至成童文藝蔚然嘗以家貧無以養親為憂因廢功令之學躬自耕樵以養親為一生事嘗自誠曰古人有言曰行有餘力則以學問今之人每每以讀書為急務不復知有孝悌是遺其本而求其文雖有韓柳之文吾所不取也未嘗以讀書廢事役亦未嘗以疲勞廢讀是以文章日就而亦不以貧窮為累時人稱今之董生 歲丙寅淑夫人沉疾公愛形於色藥餌之供侍湯之節躬自執之未嘗以家人子侄代之及其危就衣不解帶畫宵禱天願以身代斷指注血以延時日之命及 遭艱哀毁骨立承旨公恐至傷孝每撫慰之庚午丁外艱執禮之篤過於前喪及服關猶以事親之未盡力執禮之未盡誠為恨偏所居曰自省齋盖省吾身之未盡誠襟懷瀟灑不以富貴榮辱介其心志逍遙自適悠然有逸世之趣純祖癸已年五十八以六月十六日卒于第墓全州府東麒麟峯西麓子坐原後以次子炳琳壽職推蒙三世恩典 贈公嘉善大夫户曹叅判公仁厚恭儉事親甘旨未嘗乏厨執禮薑桂不入於口晨夕謁廟朔望省墳雖祈寒盛暑迅雷暴雨終始不懈處兄弟則友愛彌篤處宗族則敦睦既擎悌於長而信於友言常簡默喜怒不形是以道内章甫屢薦刺史竟未蒙旌她之典可勝嘆战配晋州姜氏昌虎女無育繼配晋州姜氏昌文女生 正宗戊申卒于純祖壬午十一月二十二日墓公塋俱 贈貞夫人有二男炳球炳琳護軍炳球二男在英在俊出二女適安東權在天梅軒遇后次女適彦陽金榮九主事龍巖承績后護軍系男在俊四女適全州崔光曦烟村德之后次女適東萊鄭圭桓楓川 守弘后三女適康津金泰欽誠齋若默后四女適星州李松烈一齋恒后在英男東權女南陽洪禹昌判書景霖后書景霖后在俊三男東鎰東赫東彬三女長適清州韓圭洪清城君終孫后次女適康津金館述遠慕堂後進后三女適全州崔佑弼威靖公七夕后以下內外孫多不盡錄 자성재공휘상렴행장(自省齋公諱相廉行狀) 공의 휘는 상렴(相廉)이요 자는 겸지(兼之)며 호는 자성재고 옥천조씨인데 고려 검교 대장군 문하시중 장(璋)을 시조로 평장사 여(璵) 충헌공 원길(元吉)이조판서 연(淵) 사인 응(膺) 사정 득재(得才)군수 장손(長孫) 통정 우(瑀) 진사 필(弼)통정 경충(景忠) 증참판 계훈(繼勳)가선 광종(光琮) 찰방 정협(廷協) 통덕랑 희벽(希壁) 이 곳 공의 五세이상이었다. 고조휘 만익(萬益) 증조휘 태기(泰基)는 다 덕을 숨기고 벼슬 아니하였으며 조 이주(以周)는 증장악원정이요 고 한좌(漢佐)는 증좌승지며 비는 숙부인 여산송씨 지록(之籙)녀였다. 공이 一七七六(正宗丙申)년에 출생하여 성품이 밝고 민첩하며 인자하고 七·八세에 능히 어버이를 사랑할 줄과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취학하여 과문정독을 아니하여도 스스로 글 읽을 줄을 알며 장성하매 문예가 진취하였으나 일찍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 봉양할 것이 없음을 근심하고 인하여 병거업(兵車業)을 폐하며 몸소 갈고 나무하여서 어버이 봉양을 一생사업으로 하였다. 일찍 스스로 경계하되 옛 사람 말에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읽으라 하였는데 지금 사람은 매양 학문을 본업으로 알고 효제를 모르니 이는 근본을 버리고 그 문자만 탐한 것이라 비록 한퇴지(韓退之) 유자후(柳子厚)의 문학이 있어도 나는 취할바 아니로다. 일찍 독서로써 일을 폐치 않고 피로하다 하여 독서를 폐치 아니하니 이로써 문장이 날로 진취하고 빈궁이로 써 하자가 되지 아니하니 당시 사람이 이 세상 동생(董生)이라 하였다. 병인(丙寅)년 에 숙부인 병을 얻으니 공이 얼굴에 근심빛을 띠고 의원에게 물어 약을 지어 다린 절차를 몸소 하고 집안 사람으로써 대신 아니하였으며 병이 위독하매 띠를 끊이지 않고 밤 새벽으로 하늘에 빌어 대신 하기를 원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한때 연수(延壽)하였다. 상사를 당하여 몸이 파리하게 슬퍼하니 승지공이 효도를 상할까 두려워하여 매양 어루만져 위로하였다. 정오(庚午)에 부친상을 만나 집상의 독실함이 전상 때보다 더하였고 탈상후에 오히려 어버이 섬기며 힘을 다하지 못함과 초상때 정성을 다하지 못함을 한(恨)하여 그집에 자성재라 쓴 것이다. 지조가 담백하여 부귀영욕(富貴榮辱)을 마음에 두지 않고 편안히 노닐며 침착하게 티끌세상을 벗어난 지취가 있었다. 一八三三(純祖癸巳)년 六월 十六일에 향년 五十八세로 별세하여 묘소는 전주부동 기린봉서록자좌원(麒麟峰西麓子坐原)에 있고 뒤에 차자 병림(炳琳)의 수직(壽職)으로써 三세은 전 을 무릅써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공이 어질고 두터우며 공순하고 검박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좋은 반찬을 일찍 떨추지 않고 상중(喪中)에 약을 안먹으며 조석으로 사당에 참알하고 삭망 성묘를 비록 혹독한 추위와 심한 더위며 빠른 우뢰와 사나운 비에도 시종 게을리 아니하였다. 형제간에 우애하고 겨레끼리 화목하며 어른께 공경하고 친구간에 신실하며 말이 항상 간결하고 침묵하며 기쁘고 성난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니 이로써 사림이 여러번 자사(刺史)에 추천했으나 정포를 얻지 못하였으니 가히 한탄할 일이로다. 배는 진주강씨 창호(配晋州姜昌虎)녀로 一七六(英宗戊子)년에 출생하여 一八二二(純祖壬午)년 十一월 二十二일에 졸하여 묘소는 공영에 부장하고 정부인을 증이하였다. 남은 병구(柄球) 병림(柄琳)인데 병림은 호군(護軍)이요 병구 二남은 재영(在英) 재준(在俊)인데 재준을 출계하고 녀는 안동권재천(安東權在天) 언양김영구(彦陽金榮九) 처요 병림계가재준 四녀는 전주최광희(全州崔光曦) 동래정규환(東萊鄭圭桓) 강진김태흠(康津金泰欽) 성주이송열(星州李松烈) 처며 재영 남은 동권(東權)이고 녀는 남양홍우창(南陽洪禹昌)이요 재준 남은 동일(東鎰) 동혁(東赫) 동빈(東彬)이며 녀는 청주한규홍(清州韓圭洪) 강진김관술(康津金綰述) 전주최우필(全州崔佑弼) 처고 이하 내외손은 다 기록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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